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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서재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 - 앤 브론테 : 이성과 야성 사이,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다.

by 코코리짱 2008.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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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그레이 - by 앤 브론테 (이미지 출처 : yes24)

시립 도서관에서 신간 구경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보게 되고 집어든 책이다.
제인 오스틴 시리즈는 작년 영화는 "비커밍 제인", 드라마는 bbc판 "이성과 감성"을 끝으로,
더이상 재탕해 먹을 께 없어지자 눈돌린 게 브론테 자매 이야기인 것 같다.
이미 "브론테"라는 영화(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도 진행 중인 것 같고, bbc판 제인 에어도 2006년도에 새로운 버젼으로 제작되어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기도 했었다.
(비록 비쥬얼에 치중한 스타일이었지만, 그래도 토비씨가 로체스터로 나온 게 어디야!
로체스터를 하기에 그는 너무 잘생기긴 했지만...)

아무튼, 나름 최근 화제가 있는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들.
출판사 측에서 그런 유행을 놓칠 리 없고, 그래서 발간되고 있는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들.
자매 중에서는 언니 샬롯 브론테가 가장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그녀의 작품으로 인해서 다른 동생들의 작품들도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솔찍히 개인적인 사담이나 연애담(샬롯의 경우에는 꽤 많은 청혼자들도 있었다는데 다 뿌리치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었던 그녀. 훗날 아버지의 목사보와 결혼하긴 하지만서도. 그러고 보면 그 집안의 유일한 남자 형제만 해도 유부녀와 스캔들이 나서 멀쩡한 가정교사에서 쫓겨났고.)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도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나 앤 브론테에 관련된 사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에밀리 브론테 관련 이야기는 언니인 샬롯 브론테가 관련 문서를 모두 태워버려 남은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하니 좀 미스테리하기도 하다.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태였고, 위의 언니들도 열악한 기숙사에서 병으로 일찍 사망했는지라, 자매간의 정이 각별했던 듯 하다.
샬롯에게 엄마의 정을 생각하면서 자랐다고 하는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의 작품은 구성의 탄탄함과 나름 당시 시대상을 외면하지 않고 차분하게 잘 그려내기도 했고,
제인이라는 여성의 독립적인 삶과 로맨스를 조화롭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은 과연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감성, 야성에 충실하다.
읽다보면, 정신 세계가 저 너머 어딘가로 갈 정도로 주인공들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심하게 내성적이었다고 하는 그녀와는 정반대로 작품 세계는 정말 기괴히다.
오히려 21세기였다면, 웬지 더더욱 각광받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오로지 도덕적인, 교훈적인, 기독교적인 작품들이 대세였으니까.
그녀만큼 인간의 내면과 욕망에 충실한 작가가 당시 또 어디 있었을까.)
각설이 참 많이 길었는데, 작품성을 인정받은 샬롯과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며 널리 알려졌던 에밀리.
그런 그녀들을 언니로 둔 앤 브론테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앤은 그냥 브론테 자매들의 일원일 뿐.

그런데, 시립도서관에서 우연히 표지가 매력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어든 책이 바로 앤 브론테의 작품이었다.
첨에는 아그네스 그레이? 제인 그레이(9일간의 여왕이었으며, 블러디 메리에 의해 처형된 여성)랑 무슨 관련이 있나?
얼 그레이(홍차 종류)랑 관련이 있나? 그것도 아니면 신의 아그네스랑 무슨 관련이라도?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언니들에 비해 비교적 평범한 내용에 평범한 구성, 평범한 필체로 쓰여진 작품이기에,
의외로 주목받지 못했었다는 "아그네스 그레이"는 오히려 나에게는 그녀의 언니들의 작품보다 더 공감이 많이 가는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일인칭, 독백 형식으로 쓰여져서 그런지 몰입도 또한 강했다.)

첨엔 딱딱 끊어지는 문체에 원래 원작의 느낌이 그런건가 싶을 정도로 흥미롭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시작은 마치 한탄하듯이 시작.
그러나, 몇 페이지를 읽어나감에 따라 느껴지는 직선적으로 비꼬아 놓은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에 흥미로움을 느끼며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제인 에어의 경우에는 제인 에어의 어린 시절 이야기(특히 기숙사 애기는 그녀의 언니들의 죽음을 실제로 겪었던 일인 만큼 상당히 현실적이다.)는 상당히 설득력있게 느껴지고, 제인의 처지가 상당히 이해가 잘 되었던 반면 제인이 가정교사하는 내용은 웬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물론 제인 에어에서도 상류츠에 대한 비꼬음과 가정교사에 대한 그들의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그네스 그레이처럼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하지 않았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Under the Rose를 본 후 Emma를 보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더군다나, 자전적인 소설인 만큼 웬지 모르게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또 짜릿하다.
원래 솔찍하게 뒷담화 까놓은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 유발하게 되는 법.

물론 읽다보면 답답해서 가슴이 콱콱 막히는 부분이 많다.
시대적 상황이, 계층이 그녀를 계속해서 참도록 만드는 것 같았고, 그 참고 인내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겨워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간계층이라는 그 입장이 얼마나 애매한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지식과 교육 수준은 상류층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나은 수준이거나 동등한 수준이지만, 상류층에게 고용된 입장이므로 무늬만 가정교사일 뿐 결국엔 고용인일 뿐이다.
(가끔씩 상류층 사이에 있는 그들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취급되거나, 절대 존중되어지지 않는 상대다.
 가정교사는 허울 좋은 보모 겸 하녀, 전용 놀이상대 정도의 느낌이 든달까.)
그리고 하인들 입장에서도 역시 중간계층을 보는 시선은 따겁고, 아무리 교육받아봐야 결국 우리같은 고용인 처지. 잘나봐야 결국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라 생각하고 더더욱 무시한다.
이 작품은 그 당시 가정교사라는 직업이 이중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라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비꼬아놓았다.

고향에서, 집안 사정이 기울어지자 자신도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걸 가족에게 증명해보이기 위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정교사로 독립한 아그네스.
자신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집안에서 뭘해도 그저 귀여운 막내, 혹은 뭘해도 못 미더운 막내의 처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태어나면서 이미 가족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안정적으로 자라는 맏이와는 달리 막내나 둘째는 항상 다른 시도를 새롭게 해야 관심을 얻을 수 있기 마련이다. 가족중에 뛰어난 형제, 자매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 언니들이 샬롯, 에밀리 브론테 자매였으니, 그들의 그늘 아래에서 묵묵히 있어야 했던 그녀의 처지가 웬지 이해가 잘 갔다. - 청운의 부푼 꿈을 간직하고 시작한 가정교사 일은 역시 현실이었다.

사랑받고, 관심받으며 자랐던 그녀가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그러니까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생활에 지치고, 자존감없이 서서히 가라앉는 분위기였는데, 어느 날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웨스턴 목사보.
그에게 받은 좋은 감정이 탐스러운 장미처럼 서서히 활짝 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아그네스가 사랑스럽고도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작품 중에 그의 감정은 또 잘 드러나지 않아서(그래도 느낌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예감은 있었다.) 참 많이 답답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속마음을 표현했었을때 - 절대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  너무나 솔찍해서 감동적이었다.

혼자서 열심히 삽질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폭해버리는 아그네스 그레이라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의 일기장 훔쳐보기. 나는 개인적으로 즐겁게 감상했던 작품이었다.
그녀의 언니들과는 달리 잔잔한 기쁨과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가슴에 와닿는 내용.
특히나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개 끄덕이면서 '나도 그랬어!' 할 만한 공감대.
키다리 아저씨(물론 속편도~)를 읽은 이후로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간만에 읽는 즐거움을 준 작품이었다.
- 물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간혹가다 보이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나 구절은 역시 목사의 딸인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다가, 당시 소설의 분위기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부분이 간혹 좀 많이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은 당시 가정교사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제인 에어, 베네티 페어와 함께 19세기 가정교사 소설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적으로 뭔가 이뤄내려는 여성을 모습을 그린 모습도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