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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산책/원작이 있는 영상

ATONEMENT (2007)

by 코코리짱 200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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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Title Films 2월 26일 엄마와 용산 CGV에서 함께 감상.

텍스트의 세계는 질서 정연하다.
물론 필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는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필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순간의 선택과 타이밍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마디로 예측불가능하고, 혼돈 속에 빠지기 쉬운 것이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영화의 원작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텍스트의 세계(=즉 혼자만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충돌이었다.
텍스트의 공간에서 나 혼자만의 망상이나 상상은 괜찮을 수 있지만, 그 망상이 현실 세계에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더이상 망상과 상상일 수 없다.
물론 혼자만의 망상이나 상상이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현대의 문명은 대부분 인간의 상상력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되돌리지 못할 최악의 결말을 가져오기도 한다.
인생이 DVD영상처럼 되돌리기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 번 내뱉은 말이나 상황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가수 전영록씨의 노래처럼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면 되니까."
쓰다가 틀리면 지우고 다시 쓰면되는 텍스트의 세계와는 달리, 현실 세계는 그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잊을 수도 없을 뿐더러,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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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Title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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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Title Films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어린 브라오니가 있다.
그리고, 우정에서 사랑을 향한 감정으로 가려는 과도기 단계의 두 연인인 로비와 세실리아가 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소녀의 망상에서 생겨난 오해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겉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번져나가고 만다.
(영화 "천상의 피조물"을 보라. 두 소녀는 망상이 현실로 실현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브라오니의 경우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묘사가 섬세하고 감정의 흐름을 너무나 예리하게 표현한 원작을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작품을 영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역시나 현존하는 감독 중에 가장 시각적인 영상미가 뛰어난 조 라이트 감독이 감독한다기에...
어떤 느낌일지 참 궁금했었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인 영상미가 뛰어나지만 사실 가벼운 느낌도 없이 않아 있기에.
 조금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살아있었다면 이 작품을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감독이 아닐까도 생각하지만.
 조 라이트와 달리 좀 더 참혹한 결말을 보여줬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아쉬움은 뒤로.)
원작의 예민하고 섬세한 면들은 생생한 컬러에 약간 뿌연 화면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내고,
규칙적인 타자기 소리는 질서 정연하고 통제가 되면서도 불안한 브라오니만의 텍스트 세계를 잘 표현해냈다.

물론, 원작에서와는 다른 방향으로 그려냈고, 결론과 충격의 강도도 달랐지만.
원래 텍스트의 세계와 영상의 세계는 다르지 않았던가.
찬란할 정도로 아름답기에, 더욱 안타까웠던 그런 영화.
순간이었기에 영원이 아님이 더욱 슬퍼지는,
어긋나서 이뤄지지 않았음이 마음 깊이 상처로 새겨지는,
끊임없는 역설의 미학이 떠오르는.......
그게 내가 영화 속죄에게 받은 느낌이다.

P.S.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또다른 자기만의 텍스트 세계에 빠진 한 여성의 이야기인 "엔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천상의 피조물"도.
가끔 생각해본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건 중요하고. 어쩌면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기본 원동력이 되는 건 바로 그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 사람들이겠지만, 그게 때때로 독이 될 수 있는걸까 하고 말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이 영화를 평범한 로맨스, 멜로물로 생각하고 온 사람들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린 브라오니가 너무 완벽하게 잘 어울려서, 성인과 노년의 브라오니역의 로몰라 가라이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아주 쟁쟁한 배우들임에도 밀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
앞으로 주목해야 겠어.

<이미지 출처 : 씨네서울 http://www.cine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