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문학 선생님은 글이라는 것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하시곤 했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생명력이 있는 말에 비해 간접적인 글은 이미 죽은 표현이라고. 
거의 반사적으로 지문을 속독으로 읽고, 문단의 숨은 뜻이나 중심 문장을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나에게 문학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글의 한계는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
더군다나 그 이후 대학을 가서도 수능시절 반사적으로 읽던 우리 문학들에 너무나도 질려서(이미 아주 예전부터 우리 문학과는 안 친했던 사람) 남들 다 읽는다는 "아리랑", "태백산맥"(요즘도 필독서일까?) 등등은 손도 대지 않았다.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랬다. 
그랬었기에, 이미 죽은 표현인 글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바다의 기별"은 여태껏 읽은 책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바다의 기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훈 (생각의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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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투박하지만,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화가 오치균의 그림이 글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진다.


제목은 바다의 기별인데, 책표지부터 시작해서 읽어보면 흙냄새가 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원동력이 되는 타라의 붉은 흙처럼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지만, 고향에서 느낄 수 있는 정겨운 흙냄새.
얼마전 다녀왔던 강원도에서 보았던 새까만 하늘을 수놓던 그 무수한 별들이 보이는 듯하고, 나무냄새도 은은하게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책.
이미 "책머리에"에 나오는 짧은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단어의 완벽한 나열.
여태껏 문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는 생각을 해봤어도, 단어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만큼 상대적으로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그럴지는 몰라도 단어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김훈씨의 "바다의 기별"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독보다는 속독을 해오며, 마치 게눈 감추듯이 쓱삭 헤치우기 바빴던 사람에게 재료와 양념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 법을 깨우쳐준 책. 
단어의 운율과 단어의 나열과 문장. 그리고 문단. 이런 식으로 느끼면서, 생각하면서 여유롭게 책을 읽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책은 일단 3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1부 바다의 기별, 2부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3부 말과 사물
나머지 부분은 서문과 수상소감인지라 생략.
바다의 기별에서는 작가의 살아온 나날들을 뒤돌아보면서 옛 기억 더듬으면서 현재를 바라보는 느낌이라면,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에서는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느낌이었고.
수록된 글 중에 가장 많은 깨우침과 생각을 하도록 해준 말과 사물은 마치 대학시절 새내기였을 때의 시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른바 가치관의 혼란이 가장 컸던 시기.
내가 알던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과연 진실이란 어떤 것인가 고민하던 그 시기로 다시 돌려보내진 듯해서 책을 읽다가 잠시 멍해졌다.

작가가 말했듯이 의견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은 언어, 소통보다는 단절이 심화되는 이 사회에서 단순성과 명석성, 실물의 구체성과 사실성이야말로 소통하는 언어, 죽은 글이 아닌 살아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늘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문제와 대인관계로 고민하고 내가 쓴 글이 타인에게 다른 뜻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커다란 과제를 남기고 가면서도, 햇병아리 후배를 다독이는 대선배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책.
나에게 단어의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소통이란 끝없는 자기반성과 다른 말의 부정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줬던 김훈 선생님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끊임없이 어려움을 느끼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단어와 문장을 느끼면서,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하고 싶은 책. 몇 년 단위로 다시 읽으면서 내 나이 몇 살 때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해보고 싶고, 스테디셀러로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인상깊었던 구절 몇 가지

실물만이 삶이고 실물만이 사랑일 것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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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서재  |  2008.12.1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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